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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승만은 거짓말이다] #3. 송재윤 교수의 “슬픈 중국”과 리영희의 문화대혁명 사기극

 

리영희의 무덤 앞에 송재윤 교수의 슬픈 중국3부작을 가져다 놓자. 저승에서나마 이 책을 읽고 철 좀 들으시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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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억 중국인은 어떻게 개인의 자유를 잃었을까?

 

중국의 15억 인구는 어떻게 하늘이 한 개인에게 부여한 천부의 자유를 잃고 공산당과 그 수괴인 1인 독재에 침묵·순종하며 살아왔으며, 지금도 살아가고 있을까? 이런 근본적 의문에 대한 답을 제공하는 역작이 발간되었다. 캐나다 맥마스터대학 역사학과에 재직 중인 송재윤 교수의 3부작 슬픈 중국이 그것이다.

 

슬픈 중국3부작은 충격과 경악 그 자체다. 지금까지 마오쩌둥이 저지른 광기의 학살극을 중국공산당은 대약진운동(The Great Leap Forward)’이니 문화대혁명으로 미화 찬양해 왔다. 저자 송재윤 교수는 그것을 인류사 최악의 대역진 운동(The Great Leap Backward)이자, 문화 대반란으로 정정한다. 송재윤 교수의 문혁 강의를 수강한 중국 출신 학생은 문혁을 십 년 호겁(浩劫)’, 10년 대재난이라고 외쳤다고 한다. 송 교수의 저작을 통해 문혁의 진면목을 독자 여러분에게 소개한다.

 

문혁이 중국 인민을 박살 낸 난동·반란이었음을 폭로한 주인공은 한 시절 중공 국방부 장관, 인민해방군 10대 원수 중 한 명이었던 예젠잉(葉劍英)이다. 그는 문혁 10년의 광란 속에서 마오쩌둥이 약 13,000만 명에게 정치적 타격을 입히고, 수백만을 죽음으로 내몰았다고 폭로했다. 마오가 중국을 지배한 27년 동안 연평균 100만 명씩 도합 2,700만 명이 라오가이(勞改)에서 처형되거나 자살하거나 과로사했다. 라오가이란 반혁명 분자의 정신 개조를 위해 강제노역을 시키던 정치범 수용소를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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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재윤 교수의 3부작 "슬픈 중국". 15억 중국인은 어떻게 개인의 자유를 잃었는지를 탐구한 역작이다.

 

송재윤 교수가 슬픈 중국에서 밝힌 인명피해 상황은 다음과 같다. 중국공산당 중앙은 27개월 걸친 조사와 검증을 통해 19845월 문혁(文革) 10년 동안 1728,000여 명이 비자연적 원인(집단 린치, 테러 등 포함)으로 사망했다. 135,000여 명은 사형에 처했고 703만여 명이 부상을 당하거나 회복 불능의 불구가 됐으며, 7만여 호의 가정이 파괴됐다고 발표했다. 억울하게 죽임당한 사람을 포함하면 피해자가 2,000만 명에 달한다는 주장도 있다.

10년 호겁 기간 중 전국의 인민은 편이 갈려 서로를 헐뜯고 때리고 짓밟고 쏴 죽이는 집단 광기의 마녀사냥을 자행했다. 대중동원, 집단 감시, 상호 문책, 동료 고발, 자백 강요, 인민재판, 즉결 처형, 우파 사냥, 사상 개조, 테러 등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가혹하고 끔찍한 수단이 총동원되었다.

 

#. 마오쩌둥 광기의 근원은 스탈린

 

마오쩌둥식 계급투쟁의 핵심 본질은 인간 집단을 인민과 적인(敵人), 아군과 적군, 혁명 세력과 반혁명 세력으로 대립시킨 후 자신들은 절대 선()의 편에 서서 절대 악()과 투쟁을 선포한다. 이 모든 난동의 기획·연출자는 마오쩌둥이었다.

 

격류가 중국대륙 한복판을 휩쓸고 지나가는 대동란의 과정에서 국가주석 류사오치(劉少奇)를 재판 절차 없이 광장에 끌어내 인민재판을 벌여 죽게 했고, 덩샤오핑(鄧小平)의 동생은 자살, 장남 덩푸팡(鄧樸方)은 홍위병에게 쫓기다 베이징대학 건물에서 투신하여 평생 불구가 되었다. 중공 최고 권력 실세들마저 이 지경이었으니, 일반인들 신세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쉽게 이해하실 것이다.

 

마오가 자행한 모든 악마적 계급투쟁 수법의 원조는 스탈린이었다. 스탈린은 소련 비밀경찰 NKVD(KGB의 전신)의 운영을 통해 축적한 고문 취조 및 사상검증, 인간 사냥, 정적 제거, 공포통치 기법을 소련 유학파 캉성(康生)을 통해 마오에게 전수했다.

 

스탈린은 소련 비밀경찰의 잔혹한 수법을 전수받은 캉성을 마오 진영에 알박기해놓고 캉성을 통해 공산혁명이란 낭만적인 휴머니스트 투쟁이 아니라,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인간사회를 전면 개조하는 잔혹한 비타협의 사회 공학임을 일깨웠다. 마오는 캉성을 통해 자발적이고 적극적으로 스탈린의 공포통치술을 학습했다.

 

마오는 1939년 상하이 배우 출신인 장칭(江青)과 네 번째 결혼했는데, 소문에 의하면 캉성이 장칭을 마오에게 붙여주었다고 한다. 장칭은 캉성과 연인 사이였던 것으로 알려졌는데, 이것이 사실이라면 캉성은 절대군주 마오의 충성심을 사로잡기 위해 자기 애인을 공양물로 바친 셈이다.

 

세계사의 모든 거대한 혁명은 폭력적 권력이 지식인의 정치적 상상력과 결합될 때 비로소 완성된다. 병력을 동원해 정권을 탈취한 후, 이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아름다운 꿈을 팔아 대중의 마음을 훔치거나 속여야만 한다. 이를 위해서는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고, 대중을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조종할 수 있는 정교한 이론과 선전선동술의 계발이 요구된다.

 

마오는 스탈린에게 중국공산당은 무장투쟁에 몰두한 결과 이론적 무장이 부족하다는 점을 실토한다. 이 말을 들은 스탈린은 소련공산당의 대표적 이론가 파벨 유딘을 주중대사로 파견, 1953년부터 1959년까지 중국의 고급 공산당 간부들에게 공산주의 이론을 지도했다. 결국 중국에서 발생한 대약진운동과 문혁의 파멸적 결과는 마오쩌둥과 스탈린의 합작품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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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중국"의 저자 송재윤 교수.

 

#. 문화 대반란의 진짜 이유는?

 

그렇다면 마오는 대체 중국공산당 동지와 자국민을 대상으로 왜 이처럼 피비린내 진동하는 끔찍한 짓을 백주에, 그것도 중인환시리(衆人環視裡)에 자행한 것일까?

 

마오는 대약진운동의 실패로 4,500만 명의 인민을 굶겨 죽인 책임을 지고 권력 일선에서 물러났다. 이후 국가주석 류샤오치와 덩샤오핑의 노력으로 간신히 경제가 성장 국면으로 돌아서자 마오는 잊혀진 존재로 역사적 퇴장을 강요당할 위기에 처한다. 권력의 화신이었던 마오는 이런 상황을 인내할 수 없었다. 그는 권력 찬탈을 위해 나이 어린 학생을 동원하여 무자비한 정적(政敵) 제거와 권력 찬탈의 대반란이 문화대혁명이었다.

 

다시 말하면 문혁은 인류 발전을 위한 고상한 실험이 아니라, 4,500만 자국 인민 굶겨 죽인 죄로 권좌에서 밀려난 마오가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에게 집중되는 권력을 찬탈하기 위한 투쟁이었다. 다만 그 방식이 초등학생부터 대학생까지 정신적으로 미성숙 상태의 나이 어린 학생을 동원한 군중 폭력에 근원을 두고 있다는 점이 일반적 권력투쟁과 양상이 달랐을 뿐이다.

 

마오는 학생을 난동에 동원하기 위해 19666월 초부터 모든 학교의 정규 수업을 중단하고 학생들을 학교 밖으로 내몰았다. 명분은 직접 정치 현장에서 몸으로 부대끼며 혁명을 실습한다는 것이었다. 문혁 시기인 1966년부터 1969년까지 4년 동안 전국 대학 입학시험인 고고(高考)가 폐지되어 중국 대학 신입생 선발이 전면 중단됐다.

 

수업 중단, 입시 폐지, 정치 현장에서 혁명 학습은 청소년들에게 정신적 해방구였다. 마오는 그러한 학생들에게 사회주의 혁명 투사(즉 홍위병) 완장을 채운 후 모든 반항이나 반란에는 이유가 있다는 뜻의 조반유리(造反有理)”, “혁명은 무죄다”, “사령부를 폭파하라”, 낡은 사상(舊思想), 낡은 문화(舊文化), 낡은 풍속(舊風俗), 낡은 관습(舊習慣)을 깨부수라는 파사구(破四舊)” 지령을 내렸다.

 

이때부터 학생들은 정치 현장에서 피바람을 불러일으키기 시작했다. 자유민주주의는 개인의 기본권 보장, 소수자의 권익 보호, 다수 독재의 부정을 생명으로 한다. 반면 마오는 1949630일 중국공산당 28주년 기념식에서 인민민주독재를 선포했다. 마오는 인민민주독재를 반동 세력의 발언권은 박탈하고, 인민만이 발언권을 누리게 하는 것으로 정의했다. 즉 반대 세력을 감시 억압하는 다수 대중의 지배를 그는 진정한 민주라고 믿었다.

마오는 중국 전체 인구의 95%는 선량한 인민, 나머지 5%는 반혁명 분자로 구분하고, 5%의 반혁명 분자 덕분에 공산 유토피아의 실현에 지체된다고 믿었다.

 

“8억 인구의 5%4천만 명이다. 4천만 명의 반혁명 분자만 제거하면 중국대륙에 공산 유토피아가 도래한다!”

 

이런 거대한 망상 아래 공산주의는 인류를 구원하는 절대 선이다. 반대 세력은 공산주의에 저항하는 절대 악이다. 우리는 절대 선을 위해 절대 악을 제거한다라는 엉터리 삼단논법하에 홍위병을 동원한 대량 학살이 자행되었다.

 

#. 홍위병은 어떻게 계급의 적을 학살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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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위병들에게 비판 투쟁을 당하는 사람들. 이런 식의 인민재판을 당한 사람들 중 상당수가 수치심을 이기지 못해 자살했다.

 

최고 지도자의 선동에 흥분한 홍위병들은 집단 광기에 휩싸여 계급의 적으로 낙인찍힌 사람들을 곤봉으로 때려죽이고, 작두로 썰어 죽이고, 밧줄로 매달아 죽이고, 영유아의 팔다리를 잡아당겨 찢어 죽이는 광란의 대학살극을 연출했다. 심지어 그들은 공자 유적지를 습격하여 공자 관련 문화재 6,618점을 파괴했고, 전국 1,100개의 현 단위 도서관 중 3분의 1을 폐관하고 수억 권의 서적을 불태웠다.

 

홍위병들을 책과 펜 대신 곤봉과 몽둥이, 자동소총을 손에 들고 성적으로 우열을 가리는 대신 누가 더 계급의 적을 잔혹하게, 더 많이 학살하는가를 두고 경쟁을 벌였다. 그 과정에서 투쟁심을 부추기기 위해 하늘땅이 크다 해도/ 당의 은혜처럼 크지 못하지/ 부모가 가깝다고 해도/ 마오 주석처럼 가까울 수는 없지/ 마오쩌둥 사상은 혁명의 보배/ 누구든 그를 반대하면 우리들의 적!’이라는 혁명 가곡을 목이 터져라 불렀다.

 

거대한 몽상가 마오쩌둥은 지상에 자급자족의 공산주의 유토피아를 건설한다는 명분으로 ‘5·7 지시라는 문건을 발표했다. 이를 위해 첫째, 사회적 분업의 철폐, 둘째,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의 차별 철폐, 셋째, 상품 교환이 소멸한 자급자족의 자연경제, 넷째, 당과 정부, 의회의 통합을 부르짖었다. 급기야 그는 상품경제와 화폐제도까지 부정하고 나섰다.

 

이러한 시대착오적 망발에 이의를 제기하거나 저항하면 반혁명 분자로 몰아 홍위병들이 인민재판을 벌여 집단 린치를 가하고 끔찍하게 죽였다. 그러한 원초적 폭력이 제기될 때마다 마오쩌둥은 다수의 혁명 군중은 소수의 반당·반사회주의 세력을 독초 뽑듯이 제거하는 것이 인민민주독재라고 정당화했다.

 

나이 어린 학생들을 동원한 광기의 문혁은 그 주도권이 노동자에게 넘어갔고, 급기야 서로 자기 집단이 더 마오의 철학을 신실하게 실천하는 진짜라고 외치며 편을 갈라 죽이는 무장투쟁으로 비화되었다. 군대 무기고를 습격하여 기관총과 수류탄, 장갑차로 무장한 세력 간의 내전으로 인한 사상자가 문혁 10년 기간 중 700만 명이 넘었다. 사회가 통제 불능의 상황으로 치닫자 마오는 전국에 인민해방군을 투입하여 진압에 나섰다. 군대와 홍위병 간의 전투로 또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잔치가 끝나면 사냥개를 삶는 법. 천하 대란을 일으켜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을 무력화시키고 권력을 찬탈한 마오는 홍위병들을 네이멍구, 신장, 윈난, 헤이룽장 등 농촌과 첩첩산중의 산간오지로 내쫓아 강제노동을 통한 사상 개조작업에 돌입한다. 이 작업은 하방 혹은 지식 청년의 상산하향(上山下鄕, 산으로 오르고 마을로 내려감)으로 미화되었다.

 

관영매체들은 하방을 사회주의 건설을 위한 자발적 실천 투쟁이라고 미화 찬양했다. 하방 당하는 나이 어린 학생들은 우리도 두 손이 있으니 도시에서 한가로이 밥 먹지 않겠노라!”라고 외쳤다고 보도했다. 하지만 그 실상은 학생들의 학업 권리와 지식 연마의 시간, 진학의 기회를 빼앗는 잔인한 강제노역이었다.

 

1967년부터 1979년 사이 당시 도시인구의 13.7%에 달하는 1,647만 명이 하방되었다. 하방을 거부하면 반혁명 분자로 낙인찍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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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공산당은 중국인들을 생지옥의 현장으로 몰아넣은 마오쩌둥을 '살아 있는 신'으로 숭배하라고 부추겼다.

 

#. 10년 대반란의 몸통, 마오쩌둥의 과오

 

마오의 분신이었던 문혁 4인방이 체포된 후 개혁개방의 분위기 속에서 19816월 중국공산당 고급 간부 4천 명이 한자리에 모여 대약진운동과 문혁에 대한 정리 작업을 진행했다. 이때 나온 발언 중 가장 과격한 내용은 역사상 최대 폭군을 들라면 반드시 마오쩌둥을 꼽아야 한다라는 것이었다. 마오와 동향 출신으로 평생 공산주의 운동을 함께 하며 마오의 실체를 누구보다 가까이서 목격한 혁명 원로 리웨이한(李維漢)은 마오의 10대 과오를 다음과 같이 외쳤다.

 

신민주주의만 잘 알고 과학적 사회주의는 잘 몰랐다.

 

농민과 자주만 잘 알고 산업 노동자와 자본가는 잘 몰랐다.

 

농업만 잘 알고 공업은 잘 몰랐다.

 

정치경제학을 이해하지 못해 만년에야 경제학 교과서를 읽었는데, 스탈린의 소련 사회주의 경제 문제만 공부했다.

 

경제 법칙을 연구하지 않고 정치 관점에서 경제 문제를 보았다.

 

지식분자는 그가 가진 정치 성향 및 가치관에 따라 계급을 구분하고, 문외한이 전문가를 영도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지식분자를) 취노구(臭老九, 냄새나고 늙은 9등급 무리)라고 비판했다.

 

농민 평균주의에 빠져서 1958년 일으킨 대약진은 소자산계급의 광열성(狂熱性)을 보여준다.

 

중국이 외부 문물을 활용해야 한다는 견해를 국제 수정주의라고 맹렬하게 비판했는데, 그의 자력갱생은 쇄국 자폐의 길이었다.

 

1964년에 4대 현대화를 내걸고서는 1966년에는 다시 4대 파괴를 시작했다.

 

옛날 책들만 파고들면서 옛날을 오늘에 적용한다고 떠벌렸다.

 

1981627, 중국공산당은 4천인 대토론회에서 결의된 내용을 집약하여 건국 이래 약간의 역사적 문제에 관한 결의(역사 결의)’를 발표한다. 10년 문화 대반란의 폭거에 대한 중국공산당의 공식 입장은 문화대혁명은 건국 이래 당과 국가와 인민이 겪은 가장 심각한 후퇴와 손실이었다. 문화대혁명은 마오쩌둥 동지가 일으키고 이끌었다라는 것이었다.

 

건국 이래 가장 심각한 후퇴이자 손실의 책임자는 마오라는 선언!

 

슬픈 중국의 저자 송재윤 교수는 문화대혁명이란 스탈린의 공포 정치와 마오쩌둥의 군중집회가 결합한 정치 운동이었다고 분석한다. 날마다 개최되는 군중집회에서 성난 인민들은 스틸린식 테러리즘으로 마오의 적대세력으로 내몰린 자들을 공격했다. 그것은 중국공산당의 최고 통치 원리인 인민민주독재의 화려한 대폭발이었다.

 

#. 끔찍한 문화 대반란을 미화 찬양한 리영희

 

이처럼 끔찍했던 10년의 문화 대반란을 이 땅의 지식인 리영희는 당시 쿠바 특파원 루이 암스트롱의 글 등을 인용, “중국대륙에서 벌어지고 있는 인류사상 초유의 실험, 인류 최초의 인간 의식 개조 혁명이라고 미화 찬양했다. 리영희는 서방 평론가의 말을 인용, 문화대혁명이라는 급격하고 웅장한 변화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이러한 사실은 미국 기자들만 모를 뿐 전 세계에 널리 알려진 지 오래다”, “레닌은 최초의 사회주의 혁명은 했으나 공업화는 못했다. 스탈린은 공업화는 했으나 인간 혁명은 못했다. 모택동은 공업화와 인간 혁명을 동시에 하고 있다라고 극찬했다.

 

심지어 리영희는 8억 인과의 대화에서 소련 경제사 전문가 기쿠치 마사노리(菊池昌典) 도쿄대 교수가 중국을 관찰한 후 발표한 글을 소개하면서 마오쩌둥은 스탈린과 달리 사람은 죽이지 않는다고 단언했다라고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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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쓰는 나의 유일한 목적은 진실"이라고 주장한 리영희. 그는 인류 최악의 집단 광란이었던 문화대혁명을 인류가 나가야 할 이상향이라고 끝없이 미화찬양했다.

 

리영희의 평가에 의하면 마오쩌둥은 레닌과 스탈린을 뛰어넘은 위대한 사회주의 사상가로서, 그의 문화대혁명은 인류의 이상인 평등사회를 실현하는 올바른 노선이다. 그는 1977년 발표한 자신의 저서 우상과 이성에서 문화대혁명이 스탈린의 경우처럼 무시무시한 내부 숙청이 아니라 이론 정립과 토론, 자기비판, 설득 등 매우 인간적인 방법으로 진행되었다고 찬양했다.

 

리영희가 이 책을 펴낸 시기는 19779월이다. 그렇다면 마오가 죽은 후여서 서방에서는 그가 저지른 문혁 대난동의 끔찍한 야만과 살육극 정보가 줄줄이 발표될 무렵이었다. 게다가 그는 조선일보 외신부장을 지낼 정도로 영어에 능통한 인물이었다. 과연 그가 문혁 대반란의 실상을 몰라서 그랬을까?

 

리영희는 자신의 저서 대화에서 자기는 마오쩌둥의 사상과 철학, 행동양식에 공감했다고 고백한다. , 그의 저작 활동의 목적은 지식인의 성찰적 활동이 아니라, 처음부터 대중을 향한 공산주의 선전 선동이었다. 리영희에게는 역사적 사실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공산주의 선전이 중요했다는 뜻이다.

 

마오의 죽음 이후 문화대혁명에 대한 냉정한 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는 상황에서도 리영희는 자신의 저서 전환 시대의 논리, 우상과 이성, 8억 인과의 대화, 10억 인의 나라를 통해 변함없이 문혁을 칭송했다. 그것은 학문의 외피로 위장한 친중(親中), 친마오쩌둥 정치 선전물이었다. 그의 주장은 역사적 사실에 기반을 둔 지적 고뇌의 산물이 아니라 중국공산당 선전부와 마오쩌둥을 찬양한 일본과 서구 좌파 지식인들이 쓴 글을 충실하게 번역한 정치 선전물이었다.

 

리영희는 197711월 발간된 우상과 이성의 서문에서 나의 글을 쓰는 유일한 목적은 진실을 추구하는 오직 그것에서 시작하고 그것에서 끝난다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는 진실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 땅에 친중, 친마오쩌둥, 친사회주의(공산주의) 사상을 퍼뜨리기 위해 일종의 사기극을 벌인 셈이 됐다. 중국의 개혁·개방으로 중국공산당마저 문화대혁명의 핵심 본질을 폭로하는 바람에 더 이상 문혁 사기극의 약발이 먹히지 않게 되자 그는 은근슬쩍 숭배의 대상을 북한과 김일성으로 방향을 전환한다.

 

#. 리영희를 끔찍하게 흠모한 문재인

 

세월이 흘러 자신이 인간개조 혁명이라고 미화 찬양했던 문화대혁명의 참상이 밝혀지자 그는 이런 변명을 내놓았다.

 

내가 문화혁명 와중에 그것을 보고 쓰고 할 때는 진실의 전모 다 파악하기 어려웠다. 더구나 남한 같은 극히 제한된 정보와 자료 속에서는 누구나 그랬다.도대체 문화혁명이라는 것이 사회주의 혁명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며, 왜 필요하며, 그것이 운동의 발전 법칙상 어떻게 상호 연관되는가 하는 점을 완전히 파악하기조차 정말 어려웠으니까.”(2005년 발간한 대화에서)

 

이것이 사실이라면 이 사람은 정말 지독한 사기꾼이다. 전모를 알지도 못하면서 그토록 확신을 가지고 문화대혁명을 인류의 유토피아라고 강변했다는 말인가? 리영희는 이런 식으로 자신의 거짓말을 인정하지 않고 구질구질한 변명 따위나 늘어놓다가 사망했다. 이것이 한국의 보편적인 사람들이 칭송해 마지않는 진보적 지식인’, ‘의식화의 은사’, ‘실천하는 지성리영희의 일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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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영희가 사망했을 때 빈소를 찾아가 리영희의 부인에게 애도를 표하는 문재인 당시 노무현재단 이사장. 문재인은 리영희를 지극히 흠모하고 존경했다고 여러 차례 밝혔다.

 

더더욱 참혹한 것은 리영희의 지식 사기극에 동조한 사람들이 어마어마하게 많다는 사실이다. 대통령이 된 문재인은 자서전 운명에서 대학 시절 나의 비판의식과 사회의식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분은, 그 무렵 많은 대학생이 그러했듯 리영희 선생이라고 자랑스럽게 밝혔다.

 

그는 노무현재단 이사장으로 재직 시절인 2010127일 리영희의 빈소를 찾아가 조문하고 부인 윤영자 씨에게 우리 세대에게나 학생운동, 민족운동을 한 사람들은 선생님(리영희) 영향이 절대적이었다. 개인적으로도 선생님 통해 이 세상을 어떻게 봐야 하는지, 지식인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그런 것을 배우고 큰 사표가 되었다라고 발언했다.

 

동아일보는 2017년 대선 과정에서 후보 5인에게 지금 이 땅의 국민과 널리 함께 읽고 싶은 책이 무엇인가?”라고 질문했다. 더불어민주당 대통령 후보 문재인은 리영희의 전환 시대의 논리라고 당당하게 밝혔다. 이유는 대학 시절 이 책을 읽고 내가 상식이라 믿었던 많은 것이 실은 우물 안 편견이었음을 깨달았다. 시대가 그어 놓은 생각의 울타리 넘어 새 시대의 정의와 가치 상상할 용기 얻었다라는 이유로!

 

리영희의 무덤 앞에 송재윤 교수의 슬픈 중국3부작을 가져다 놓자. 저승에서나마 이 책을 읽고 철 좀 들으시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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